[단독인터뷰] ‘日 레전드’ 미우라, 한일전과 박지성을 말하다
입력 : 2015.05.21기사보내기 :  트위터  페이스북
[스포탈코리아=요코하마(일본)] 김성진 기자= 미우라 카즈요시(三浦 知良, 48)는 일본 최고의 축구스타다. 1967년생인 미우라는 올해 한국 나이 49세로 50세를 바라보고 있지만, 일본 축구팬들의 미우라를 향한 마음은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 뜨거워지고 있다.

나이를 보면 한창 지도자를 해야 할 시기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현역 선수다. 무늬만 현역 선수가 아니다. 이미 올 시즌 2골이나 넣으며 맹활약 중이다. 그것도 2골 모두 헤딩골이었다. 젊은 선수 못지 않은 탄탄한 신체와 경기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인기도 여전하다. 미우라의 소속팀 요코하마 FC의 구단 상품 대부분은 미우라와 관련된 것이다. 유니폼 매출의 대부분은 미우라의 이름과 등번호가 새겨진 것이다. 타월, 폰 케이스 등도 ‘KAZU 11’이 새겨진 것이라면 금새 품절이다.

미우라는 과거 한일전 때문에 한국 축구팬들에게 애증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분위기가 달라진 듯하다. 그의 오랜 현역 생활은 한국에서도 큰 관심을 보이고 있고, 프로로서 보이는 철저한 자기 관리에는 찬사를 보낼 정도다.

그런데 미우라는 한국에서 여전히 화제의 중심이지만, 그의 목소리는 쉽게 들을 수 없었다. 한국과 깊은 인연이 있는 만큼 그가 한국과 한국축구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스포탈코리아’는 미우라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요코하마 FC에 연락을 취했고 인터뷰를 요청했다.

사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요코하마 FC의 담당자가 “미우라 선수는 시즌 중에 단독 인터뷰를 하지 않는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담당자의 적극적인 권유로 인터뷰는 성사됐다. 그리고 ‘스포탈코리아’는 서둘러 일본 요코하마로 떠났다.

미우라와는 지난 4월 중순에 만났다. 인터뷰 장소는 요코하마 FC의 클럽하우스. 개인적으로 요코하마 FC 클럽하우스를 방문하는 것은 2번째였다. 요코하마 FC 클럽하우스는 요코하마역에서 소테츠선을 타고 카미호시카와역에서 내린 뒤 언덕을 따라 걸어 올라가면 도착한다.

그리고 클럽하우스에서 미우라를 만났다. 사진에서 보던 것보다 백발이 많아 그의 나이를 실감했다. 오전 훈련을 마치고 인터뷰에 나선 미우라는 약속한 시간을 넘기면서 ‘스포탈코리아’가 준비한 질문에 답했다. 웃음이 담긴 즐거움 속에서 때로는 진지하게 진행된 미우라와의 인터뷰를 5가지 키워드로 추려 지금 공개한다.



1. 한일전
한일전(韓日戰)은 일반적으로 대한민국과 일본 사이에 벌어지는 스포츠 경기나 엔터테인먼트 등의 대전을 일컫는 용어다. 일본에서는 일한전(日韓戦 닛칸센)으로 불린다. 최근에는 스포츠 외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한일 양국이 맞붙을 때 한일전이라는 용어를 쓴다. 그래도 한일전은 단연 양국 축구대표팀의 맞대결이 대표적이다.

- 미우라 선수와 한일전은 뗄 수 없는 관계 입니다. 한국 팬들은 미우라 선수가 뛰었던 1993년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미국 월드컵 최종예선 한일전을 잊지 못합니다. 당시 한일전에서 골을 넣으며 한국에 패배를 안겨줬죠. 그 이후에도 많은 한일전에서 활약을 했습니다. 한일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한국과의 경기는 옛날부터 역사성이 있었습니다. 과거에 한국축구가 잘 했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월드컵도 일본보다 빨리 출전했죠. 1970~80년대 일본과 한국의 차이를 기억합니다. 전 1990년대 들어 일본에 J리그가 출범할 때 브라질에서 돌아왔습니다. 그 당시 일본에 돌아온 뒤 바로 일본 대표팀에 들어갔는데 그때는 아직 한국과 차이가 있었습니다. 한국에는 김주성, 홍명보 같이 좋은 선수가 많았습니다. 한국은 정말 수준이 높았고 강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 이후 1992년 다이너스티컵에서 한국과 좋은 시합을 했고 그 해 아시안컵도 우승하면서 일본 대표팀은 자신을 가지게 됐습니다. 그 뒤 도하의 비극이 벌어졌고 한국과는 계속 20년간 이기고 지는 것을 반복해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인터뷰를 앞두고 한국축구팬에게 미우라 선수에 대한 이미지를 물어보니 오랫동안 선수 생활을 하는 놀라움과 함께 한일전에서의 부정적인 반응이 섞였습니다. 특히 ‘카즈댄스’라 불리는 특유의 세리머니를 이야기 했습니다. 아마도 1993년 도하에서의 한일전 때 골을 넣고 세리머니를 했기 때문인 것 같은데요. 지금도 하고 있는 이 세리머니는 어떻게 하게 된 겁니까?
J리그 출범 때 베르디에 와서 많은 골을 넣었고 매번 이 퍼포먼스를 했습니다. 그것이 어린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축구라는 것은 퍼포먼스라고 생각했습니다. 득점 뒤에 (춤추는) 퍼포먼스로 사람들이 즐기고 재미있게 느꼈습니다. 물론 당시 나이 드신 분들에게는 그렇게 인상이 좋지 않았을 겁니다. 또 상대팀은 자신을 깔본다는 인상을 받았을 것이고요. 그렇지만 20년을 했고 지금은 어린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두 기뻐하는 것 같습니다.

- 그래서 한국 팬들이 굉장히 싫어했던 것 같습니다. (웃음)
진짜 죄송합니다. (웃음)

- 과거에는 한일전이 전쟁 같았습니다. 당시의 분위기는 어땠나요?
그 당시에 한국의 실력이 위였죠. 우리는 한국을 못 이기면 월드컵을 나가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도 일본에 지고 싶지 않았고요. 일본에 지면 나라의 수치라는 마음이었죠. 과거에 (경기를 앞두고) 호텔에서 김주성을 만났는데 서로 눈도 안 마주쳤을 정도였습니다. 한국의 존재는 양국과 아시아 전체를 강하게 하는 요인입니다. 일본축구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의 존재가 컸습니다. 일본과 한국은 숙적이자 라이벌이지만, 아시아축구를 이끌 수준 높은 축구도 해야 합니다.



2. 월드컵
국제축구연맹(FIFA)이 4년에 한 번씩 주최하는 세계 최고의 축구대회. 미우라는 두 차례 월드컵에 나설 기회가 있었다. 1993년 미국 월드컵 최종예선에서는 월드컵 본선행을 눈앞에 뒀다 도하의 비극(한국 입장에서는 도하의 기적)을 겪었다. 1998년에는 프랑스 월드컵 본선 최종 엔트리에서 제외됐다. 그에게 월드컵은 한이 서린 축제다.

- 선수 생활을 하면서 월드컵에 출전하지 못한 아쉬움이 큰 것으로 압니다. 공교롭게도 미우라 선수가 대표팀에서 물러난 뒤 일본은 월드컵에 계속 나가고 있습니다. 더 아쉽지 않습니까?
프랑스 월드컵 때는 예선부터 월드컵을 앞둔 5월까지 계속 대표팀에 나갔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빠진 건 정말 안타까웠습니다. 그런 것이 축구 인생이고 누구의 책임도 아닙니다. 자기 자신의 문제로서 자신이 어떻게 하고 나아가야 하는지가 중요합니다. (지나간 일보다) 오늘, 지금이 중요합니다.

- 국가대표로서 오랫동안 나카야마 마사시, 와그너 로페스, 조 쇼지 등 뛰어난 공격수들과 파트너를 이뤘습니다. 어떤 선수가 가장 잘 맞았습니까?
아무래도 일본 대표팀에서는 나카야마와 시합을 많이 뛰었죠. 요코하마 FC에서는 조 쇼지와도 같이 했고요. 모두가 수준이 높은 선수들이기에 함께 경기하기 수월했습니다.

3. 박지성
미우라는 ‘한국축구의 레전드’ 박지성이 존경하는 대상이다. 박지성은 2000년부터 2002년까지 교토 상가 FC에서 뛰었다. 미우라와는 2000년 1년 동안 함께 선수 생활을 했다. 프로 초년생이었던 박지성은 미우라로부터 프로선수로서의 자세와 자기 관리 등을 배웠다. 둘은 이때의 인연을 계기로 지금까지 연락을 주고받으며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미우라는 2011~2012년 박지성 자선경기에 흔쾌히 참석하기도 했다.

- 한일전에서는 숙적이었지만 클럽에서는 한국선수들과 호흡을 많이 맞췄습니다. 특히 박지성과의 인연이 대표적인데요? 지금까지 함께 뛴 한국선수 중 가장 잘 맞았던 선수는 누구였나요?
개인적인 것도 있지만 한국선수 중에서는 박지성과 같이 해서 정말 좋았습니다. 박지성은 노력을 했기에 세계적으로 위대한 선수로 성장했습니다. 자선경기 때 저를 잊지 않고 불러줬고, 지금도 연락을 주고 받고 있습니다. 정말 기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은퇴를 일찍 해서) 아쉽습니다. 요코하마 FC에 와줬으면 좋겠네요. (웃음). 박지성은 어릴 때부터 진짜 성실하고 피지컬이 좋은 선수였습니다.

- 박지성 외에도 조영철, 박성호, 박태홍 등 한국선수들과 계속 인연을 맺고 있습니다. 과거 숙적이었던 나라의 선수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에 대해 어떤 느낌을 받습니까?
J리그에서 한국선수를 만나고 있는데 축구에 국경은 없습니다. 지금 함께 뛰고 있는 박태홍도 그렇고 함께 밥 먹고 놀러도 다닙니다. 물론 일본과 한국의 정치, 역사적인 관계도 있지만 축구에서는 서로 나쁘게 여기는 것이 없이 존중합니다. 국적이 달라도 팀에서 함께 뛰는 동료라면 가족입니다. 저는 일본인, 한국인이라는 의식은 갖고 있지 않습니다.



4. 후계자
우상, 상징이라는 사전적 의미답게 미우라는 일본축구를 대표하는 아이콘이다. 하지만 그가 영원히 아이콘이 될 수 없다. 어느 순간에는 후배에게 상징의 자리를 물려주어야 할 것이다. 미우라는 현재 유럽에서 활약 중인 후배들이 자신의 뒤를 이을 아이콘이 될 것으로 여겼다.

- 아들 료타가 브라질에서 유학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들과 함께 프로에서 뛰는 일이 생기는것 아닌가요?
브라질은 단기 유학이었고 지금 일본에 돌아와 있습니다. 제가 볼 때는 프로선수는 무리인 것 같네요. (웃음)

- 후계자로 생각하는 후배 선수가 있나요? 나카타 히데토시가 그 역할을 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너무 일찍 은퇴를 해 그러지 못했는데요.
당연히 나카타도 일본과 아시아축구의 큰 존재였습니다. 지금 유럽에서 활약 중인 혼다 케이스케,카가와 신지, 나가토모 유토 등 다 후계자라 말하지는 못하지만 정말 일본 축구를 끌고 가는 선수들이라고 생각합니다.

- 일본축구의 대선배로 일본 대표팀에 대해 조언을 한다면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당연히 일본 대표팀이 더 강해져야 합니다. 유럽에 나가는 선수가 더 많아져서 아시아 전체의 수준도 올려야 합니다. 일본에 어리고 좋은 선수들이 많습니다. 경험을 많이 쌓아야 할 것입니다.

5. 은퇴
미우라는 현재 48세다. 50세를 바라보는 나이다. 그는 영원한 현역선수를 하고 싶다는 바람을 전하기도 했다. 그는 과연 은퇴 없이 현역 선수를 계속할 수 있을까?

- 미우라 선수는 선수 생활 내내 등번호 11번을 달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그리고 올해 48세인데 48이라는 숫자가 자신에게 어떻게 다가옵니까?
11번은 어릴 때 소속한 팀의 선배가 달았던 번호입니다. 그 팀에서 11번이 상징이었습니다. 제게는 우상의 번호였습니다. 또 브라질에 호베르투 히벨리누라는 선수가 있었습니다. 펠레가 10번, 히벨리누가 11번이었죠. 제가 히벨리누를 진짜 좋아합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의 선배와 히벨리누를 쫓아가기 위해 지금까지 계속 11번을 달고 있습니다. 48이라는 숫자는 특별한 의미가 없습니다. 이제 50세가 되고 싶다는 생각뿐이네요. (웃음)

- 영원한 현역이 되고 싶다는 말을 한 것 압니다. 언제까지 현역으로 뛸 생각입니까?
이제까지 선수를 하면서 언제까지라는 것은 정말 모르는 일입니다. 일단 목표는 50세까지 하는 것입니다. 40세까지 현역으로 뛰는 사람은 많습니다. 41~42세까지도 하죠. 하지만 50세까지 한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50세까지 1년 반 정도 남았는데 그 때까지 현역 생활을 하는 것은 진짜 어려운 일이죠. 제가 한국나이로는 내년에 50세가 되죠? 한국에서 뛰어야겠네요. (웃음)

- 한국은 언제가 마지막 방문이었나요?
1997년 프랑스 월드컵 최종예선 한국 원정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스케줄이 안 맞아서 그 뒤로는 한국에 여행으로도 못 갔습니다. 예전에 홍명보로부터 몇 번 초대를 받았지만 잘 맞지가 않았습니다. 나카타와 얘기도 했었지만 아시아는 교류를 해야 합니다. 국경, 국적에 관계없이 친구라고 생각합니다.



사진=스포탈코리아, 게티이미지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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