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황 인터뷰] '1999년 PO 7차전' 문동환 ''인생에서 제일 부담스러웠던 경기''
입력 : 2020.06.04기사보내기 :  트위터  페이스북
[스포탈코리아=의정부] 김현서 기자= 롯데와 한화 그리고 1999년

2006년 대전 구장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투수. 프로에 첫발을 내디딘 19세 루키 류현진? 아니다. 정답은 마지막 전성기를 불태웠던 34세 베테랑 투수 문동환이다. 시즌 16승을 달성하며 야구 인생 2막을 열었던 그는 당시 신인이었던 류현진과 막강한 원투펀치를 구축하며 한화 마운드를 이끌었다. 그리고 그해 팀을 한국시리즈 준우승에 올려놓았다.

아마추어 시절 MVP를 차지했던 문동환은 1997년 롯데 유니폼을 입으며 프로 무대에 데뷔했다. 그는 1998년 12승을 수확한 데 이어 1999년 17승을 달성하며 개인 최고 성적을 기록했다. 특히 KBO리그 역대 최고의 명승부로 꼽히는 플레이오프 7차전 선발로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탄탄대로일 것 같던 야구 인생에 큰 시련이 닥쳤다. 고질적인 팔꿈치 부상이 재발하면서 오랜 시간 재활에 매달려야 했다. 결국 롯데에서 입지를 잃은 문동환은 2003년 겨울, 단 하루 만에 이루어진 두 차례의 트레이드를 통해 한화 유니폼으로 갈아입었다.

이적 첫해 문동환은 15패(4승)를 기록하며 리그 최다 패 투수가 됐다.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탓이었다. 그러나 2005년 10승, 2006년 16승을 올리며 보란 듯이 재기에 성공했다. 그리고 몇 년 뒤 14년간 선수 생활에 마침표 찍고 투수코치로 자리를 옮겼다. 한화에서 2년, 두산에서 5년을 보낸 뒤 프로 무대를 떠났고 그는 잠시 잊혀졌다.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선수, 문동환(48)을 만나 근황을 물어봤다.


-오랜만이다. 요즘 어떻게 지내나.

▶작년부터 의정부에 있는 상우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을 맡아 고교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다.

-고교 감독이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

▶프로 코치 생활을 마감한 뒤 구리 인창고등학교에서 고교 코치로 활동했다. 그러다 상우고 감독 모집 공고를 보게 돼 지원했는데 운 좋게도 붙었다. 상우고는 어떤 팀인가. 야구부를 창단한 지 6년 정도 된 신생팀이다. 첫해는 황금사자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그 뒤로는 학교가 경기 북부에 있는 데다 숙소도 없다 보니 어려운 상황들이 있었다. 현재는 아쉬운 조건 속에서도 야구를 좋아하는 학생들이 모여 열심히 대회를 준비하고 있다.

-아마 시절 제2의 선동열이라 불렸다. 현재 고교 선수들 가운데 제2의 문동환이 있나.

▶우리 팀의 투수들 모두가 ‘문동환’이다. (웃음) 굳이 한 명을 고르자면 김재현 선수(고3, 우완)인 것 같다. 덕수고에서 전학 온 선수로 팀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직구와 변화구 모두 좋고 구속은 최고 140km 초반까지 나온다. 다만 아쉬운 점은 좋은 변화구를 효과적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그 부분만 보완된다면 올해 좋은 성적을 기대해볼 만하다.

-선수 시절 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기억에 남는 경기가 있나.

▶14년 동안 프로 생활을 하면서 한국시리즈 무대에 두 번(1999년 롯데vs한화, 2006년 한화vs삼성)이나 올랐지만, 우승을 못 해본 것이 너무 아쉽다. 그때 당시 한국시리즈의 마지막 경기들이 항상 머릿속에 잔재로 남아있다.

-최고의 명승부로 꼽히는 1999년 플레이오프 7차전(롯데vs삼성) 선발투수였다. 기억나는가?

▶롯데가 한창 침체기에 있다가 좋은 성적을 거둔 해였다. 쉽게 끝날 줄 알았던 경기가 7차전까지 이르게 되면서 선발로 나서게 됐다. 지금까지 야구 인생에서 제일 부담스러웠던 경기였다. 못 던지면 역적이고 잘 던져야 본전이었다. 이 경기에서 이기고 한국시리즈 무대를 밟는 게 롯데 팬들의 염원이었다. 그러나 나에겐 너무 부담스럽고 힘든 순간이었다. 그래도 우여곡절 끝에 이겼다. 그렇다. 난투극도 벌어지고, 관중들이 계란도 던지고… 결국 경기가 중단되면서 철수했다가 다시 돌아와서 승리를 따낸 경기였다. 다만 그렇게 어렵게 올라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하지 못해 더 아쉬웠다.

- 이후 롯데에서 한화로 이적했다. 트레이드된 과정이 특이했는데 미리 알고 있었나? (정수근의 보상선수로 두산에 지명된 당일 한화 채상병과 맞트레이드)

▶전혀 몰랐다. 두산과의 트레이드 소식을 들은 당일, 사직구장에 가서 감독님에게 인사드리고 나오는데 두산이 아닌 한화 매니저에게 전화가 오더라. 당황스러워서 ‘전화 잘못 거신 거 같은데요?’라고 했더니 매니저가 채상병 선수와 역트레이드 됐다고 알려주더라. 그때서야 알게 됐다.

-트레이드를 하게 된 이유를 들었나.

▶유승안 감독(당시 한화 감독)님이 내가 만약에 정수근 보상 선수로 나오면 무조건 잡아달라고 구단에 이야기했다고 들었다. 유 감독님께 정확한 이유를 여쭤보니 ‘마운드에서 재기할 거라 믿었기 때문에 팀을 위해 너를 뽑았다’고 말씀하시더라. 아마 두산에 갔다면 (선수 생활을) 그만둘 상황이 생겼을 것 같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트레이드된 첫해 4승 15패를 기록하며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재활 후 첫 시즌이라 중간에 팔이 붓는 등 우여곡절들이 많았다. 그런데도 유 감독님은 나를 2군으로 보내시지 않고 계속 믿어주시더라. 두산은 당시에도 좋은 투수들이 많은 강팀이었다. 첫해 부진했다면 다음 기회를 얻지 못했을 것 같다.

-한화 시절 프로 데뷔 후 처음으로 올스타전에 출전했다(서군 투수부문 팬투표 1위). 문동환에게 한화는 어떤 곳인가.

▶대전은 제2의 고향이다. 야구를 더 할 수 있게 되면서 팬들의 사랑을 많이 받은 곳. 롯데 시절에도 부산 팬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부상이 잦아 미안한 부분들이 많았다. 그런데 한화에선 후회 없이 야구를 했던 것 같다.

-당시 류현진 선수와 함께 막강한 원투펀치를 구축하기도 했다. ‘신인’ 류현진은 어땠나.

▶무서웠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현진이를 처음 봤을 때부터 잘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메이저리그에서 성공할 줄 알았나?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프로에서는 무조건 잘 될 거라고 확신했다. 분명히 신인인데 경기하는 거 보면 신인이 아니었다. 자신감도 넘쳤고 자기 공에 대한 믿음도 확고했다. 그러다 보니 타자들을 압도하는 공들을 던지더라. 같은 팀에 있었지만 무서운 선수였다.

-은퇴했을 때 아쉬웠던 점은 없었나.

▶후회 없이 야구를 해봤기 때문에 특별히 아쉬운 점은 없었다. 다만 은퇴를 결정한 시즌에 부상으로 1군 경기에 단 한 번도 오르지 못했다. 개인적으로는 한국시리즈에서 준우승에 그친 것보다 마지막 해에 공 한번 못 던진 게 더 아쉬움으로 남는다.

-KBO리그 10개 구단 가운데 응원하는 팀이 있나. (롯데, 한화- 선수/ 두산- 코치)

▶세 팀을 응원하고 있다. 롯데와 한화 그리고 두산. 아무래도 몸을 담았던 팀들이라 더 관심이 간다. 지금은 아마야구에서 지도자를 하다 보니 세 팀을 TV 중계를 통해서만 보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진짜) 팬이 됐다.(웃음)

-근황을 반가워할 팬들에게 한마디.

▶팬들에겐 항상 죄송스럽다. 프로에서 아마로 거취를 옮기다 보니 스포츠 매체에 얼굴을 드러낼 기회가 별로 없었다. 선수 시절에 응원해주셨던 팬들의 고마운 마음을 잘 간직하고 있다. 앞으로 지도자로서 훌륭한 선수들을 배출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목표는.

▶전국 고교야구대회에서 16강에 오르는 게 목표다. 우리 팀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그 후에는 한 단계, 한 단계 더 나아가 우승 한 번 해보고 싶다. 상우고 학생들에게도 한마디. 오는 14일부터 시즌이 시작된다. (황금사자기 상우고 vs 광주진흥고) 경기 결과보다 너희들이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대회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펼쳐서 후회 없는 야구를 했으면 좋겠다. 상우고 파이팅!





영상, 사진= 스포탈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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