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윤의 축구생각]축구공의 진화, 첨단 과학은 필수 (1)
입력 : 2019.02.24기사보내기 :  트위터  페이스북
[스포탈코리아]물건을 발로 차거나 손으로 던지는 것은 사람의 본능이다. 축구는 이 같은 인간 본능으로 행한 최초의 놀이형태 스포츠로서, 그 태동 시기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명확하게 기술되어 있지 않다. 그렇지만 축구는 기원전에 생겼다는 게 정설이다. 고대 이집트, 그리스, 중국 등에서 옛날부터 둥근 물체를 차고 놀았다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 한다. 이렇게 축구 형태의 역사가 길고 다양한 만큼 축구공의 역사 역시 아주 길고 다양할 수밖에 없다.

축구공의 유래는 중세 때 영국에서 사형수의 피가 흐르는 머리를 군중 속에 마구 던져 차도록 했다는데 이어, 마른 풀을 뭉친 지푸라기나 돼지 방광(오줌보) 등을 찼다는 전설에서 비롯된다. 그 후 1872년 잉글랜드축구협회가 축구공을 가죽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규정한 이래 오줌보 축구공은 사라졌다. 처음 탄생된 축구공은 가죽을 있는 그대로 기다랗게 자른 조각을 붙인 것이었다. 이같은 공은 1930년 제1회 우루과이의 몬테비데오에서 국제축구연맹(FIFA) 월드컵이 처음 열릴 때까지 사용됐으며 지금의 배구공과 비슷한 모양이었다.

이 같이 탄생된 축구공은 축구공이 세계 축구사를 바꿔 놓은 대회로 꼽히는 1930년 제1회 우루과이 FFA월드컵 결승전에서,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는 공을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을 벌이는 사태까지 유발시켰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FIFA월드컵 공인구가 존재하지 않았던 만큼 서로가 자국의 공을 사용하겠다고 주장한 것이다. 결국 양 국은 FIFA의 중재 하에 전반은 아르헨티나 공, 후반에는 우루과이 공을 사용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러한 해프닝으로 1963년 FIFA는 축구공의 재질이나 형태 등을 규정하는 ‘공인구 제도’를 도입했다.

이에 기존의 가죽공은 FIFA월드컵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으며 1970년 멕시코 FIFA월드컵대회부터 세계적 스포츠용품회사인 아디다스사가 제작한 공인구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후 FIFA월드컵 공인구는 아디다스의 전유물이 됐다. 이는 세계 최대의 스포츠단체와 스포츠용품회사의 ‘정략결혼’이라고 할만하다. 아디다스사가 공인구를 독점한 뒤 아디다스사는 축구공을 한 층 가볍고 탄성 있게 개량하기 위해 부단한 연구와 노력을 거듭한 끝에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와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70년 멕시코 FIFA월드컵에서 처음으로 사용된 공인구의 명칭은 ‘텔스타(Telstar)’로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축구공의 원형이다. ‘텔스타’는 텔레비전(Television)+스타(Star) 즉 ‘TV속의 별’의 줄임말'로서 '텔스타'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가벼운 무게와 탄성 이외에도 천연가죽으로 제작되어 잘 찢어지지 않았으며 또한 당시로서는 혁신적이었던 디자인에 있었다. 정오각형에는 검은색을, 정육각형에는 하얀색을 칠한 ‘점박이’ 모양으로, '텔스타'의 경우 12개의 검정 오각형과 20개의 흰 육각형이 구체에 완벽하게 맞물리며 ‘깎은 정이십면체’를 이뤄, FIFA월드컵 최초 위성 생중계를 통하여 '텔스타'의 그 단순 명쾌한 모습은 세계 축구인 들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이런 호응 때문에 1974년 서독 FIFA월드컵에서는 '텔스타'의 후속 모델인 '텔스타 두를라스트'가 공인구로 사용됐고, 아울러 오로지 흰색으로만 구성된 ‘칠레(Chile)’를 새로운 공인구로 추가시켰다. '칠레'는 야간 경기 때 눈에 훨씬 잘 들어온다는 점이 '텔스타 두를라스트'와 구별되는 특징이었다. 하지만 '텔스타'와 후속 모델인 '텔스타 두를라스트' 그리고 ‘칠레'는 공에 방수처리를 하지 않아 비가 오거나 경기장이 축축하면 무거워지는 단점이 있었다.

이 같은 단점을 보강하기 위하여 공인구 제작사인 아디다스사는 가죽의 방수처리 개량은 물론 풍동 실험으로 공기 저항력을 테스트해, 공에 대한 최적의 모양을 찾으며 반발력과 탄력성을 높이는 신소재를 도입하며 축구공에 과학 기술을 접목시키는데 매진했다. 이 같은 노력으로 1978년 아르헨티나 FIFA월드컵에서는 아르헨티나의 고전 춤으로 잘 알려진 '탱고(Tango)’라는 이름의 최첨단 패션 축구공이 탄생했다.

삼각 줄무늬 모양이 그려진 20개 패널과 12개의 원으로 디자인 된 검정색과 흰색이 조화를 이룬 ‘탱고’의 시각적 효과를 더한 충격적인 모습은, 그때 우승을 거머쥔 아르헨티나 선수들의 줄무늬 유니폼과 함께 축구계에 라틴풍을 몰고 왔으며, 또한 완벽한 가죽 박음질로 완전방수와 함께 공의 탄력과 회전력의 혁신을 일으켰다.

아르헨티나의 민속춤 탱고의 열정, 감정, 우아함 등 여러 느낌들을 형상화시킨 '탱고'의 디자인은 1998년 프랑스 FIFA월드컵까지 무려 20년 간 FIFA월드컵 공인구의 고정 디자인으로 자리매김하며, 방수 기능을 크게 보완하여 수중전에서도 문제없이 제 기능을 다할 수 있도록 제작됐다. 하지만 축구공의 기본적인 제작 기법은 1974년 서독 FIFA월드컵 사용구인 ‘텔스타’의 틀을 벗어나지 않은 채 1998년 프랑스 FIFA월드컵 공인구까지 유지됐다.

이어 1982년 스페인 FIFA월드컵에서는 1978년 아르헨티나 FIFA월드컵 공인구 '탱고'의 개량판 쯤에 해당하는 공인 ‘탱고 에스파냐(Tango España)’가 탄생했다. 개최국 스페인의 정식 국명을 뒤에 붙여 재탄생한 '탱고 에스파냐'는 천연 가죽에 폴리우레탄 소재를 더하여 제작됐는데, 그로 인해 탄성과 반발력이 '탱고'나' 텔스타'에 비해 눈에 띄게 좋아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방수력 또한 탱고보다 한 층 강화됐다.

1986년 멕시코 FIFA월드컵 때는 ‘아즈테카(Azteca)’가 선보였다. ‘아스테카’는 디자인에 아스텍 문명의 화려한 벽화문양이 추가, 기존의 '탱고'에 비해 세련미가 느껴진다는 점이 특징이었다. 또한 '아즈테카의 제작'에는 축구공 역사상 최초로 100% 인조 가죽을 사용 제작되었으며, 그로 인해 겉 표면에서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광택이 흘렀다. 천연 가죽보다 탄성과 방수력이 모두 뛰어난 인조 가죽으로 제작됨에 따라 기능 면에서도 발전을 이뤄냈다는 호평을 받았다.

이후 공은 방수와 탄성, 회전력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1990년 이탈리아 FIFA월드컵공인구 ‘에트루스코 유니코(Etrusco Unico)’의 이름은, 이탈리아 고대의 에트루리아 문명에서 유래된 이름이었다. 1978년 아르헨티나 FIFA월드컵 부터 도입된 '탱고' 디자인을 유지하면서도, 에트루리아의 상징인 사자 문양을 첨부시켜 한 층 세련미를 더했다.

기능적으로는 '아스테카'와 큰 차이는 없었지만 공의 내부에 폴리우레탄으로 된 폼(Foam)을 첨부시켜 탄성과 방수력을 한 층 강화시켰다. '에트루스코 유니코' 공에 대한 평가는 대부분 호의적이었으며, 그로 인해 2년 뒤 1992년 유럽선수권대회에서도 공인구로 사용됐다. 1994년 미국 FIFA월드컵 공인구는 ‘퀘스트라(Questra)’였다. ‘퀘스트라’는 미국 FIFA월드컵을 통해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고 FIFA월드컵 공인구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아디다스사의 대히트작으로 성과를 남기게 됐다.

무엇보다 '퀘스트라'는 기술적인 측면에서 작은 혁명을 일으켰는데, 그 이유는 공의 표면에 기포강화 플라스틱(Syntactic Foam) 소재를 사용하여 공의 탄성과 반발력을 크게 향상시켰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능면에서의 향상은 1994년 미국 FIFA월드컵의 공격적인 성향으로 고스란히 이어졌다. 이는 FIFA 측에서 수비적이고 지루한 성향으로 크게 비판 받았던, 1990년 이탈리아 FIFA월드컵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아디다스사에 특별 지시을 내린 결과였다. 1994년 미국 FIFA월드컵을 통해 호평을 받은 '퀘스트라'는 2년 뒤 1996년 올림픽 공인구 ‘퀘스트라 올림피아(Questra Olympia)’, 1996년 유럽선수권대회 공인구 ‘퀘스트라 유로파(Questra Europa)와 같은 후속작까지 탄생시켰다.

김병윤(전 용인시축구센터 전임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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