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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표의 휘뚜루 마뚜루] ‘씻어내지 못한’ 김현수의 가을 굴욕
등록 : 2019.10.11

“4번 타자 싸움에서 키움의 완벽한 승리였다.”

10월 10일 잠실구장에서 끝난 2019 프로야구 준플레이오프 4차전에서 키움 히어로즈가 LG 트윈스를 10-5로 이겨 시리즈 전적 3승 1패로 플레이오프 진출이 결판난 뒤 SBS 방송 해설을 했던 이승엽(43)의 마지막 이 한 마디는 정곡을 찔렀다. 그의 말처럼, 키움의 4번 타자 박병호(33)와 LG의 4번 타자 김현수(31)의 엇갈린 활약상이 바로 시리즈의 향방을 갈랐다고 해도 그리 지나치지 않다.

박병호는 준플레이오프 4경기에서 타율 3할7푼5리(16타수 6안타), 3홈런, 6타점으로 시리즈 최우수선수(MVP)로 뽑혔다. 반면 김현수는 최종 4차전에서도 치명적인 병살타로 기막히게 좋았던 기회를 박차버리는 등 제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고작 타율 1할7푼6리(17타수 3안타), 2타점으로 고개를 떨궜다.

류중일 LG 감독은 4차전을 앞두고 준플레이오프 3경기에서 타율 8푼3리(12타수 1안타) 1타점으로 부진의 늪에 허덕이고 있는 김현수를 지칭하며 “김현수의 방망이가 터지길 매일 기대한다. 김현수가 해줘야 하는데 본인도 굉장히 고민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제 스타일이 뚝심과 믿음인데, (예전 삼성 감독 때도) 이승엽도 안 좋을 때 계속 썼고 결국 해줬다. 김현수가 안 맞는다고 해서 타순을 빼고 하는 것은 내 사전에 없다. 잘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OSEN 기사 인용)고 끝까지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그의 대책 없는 희망은 하릴없이 허공에 흩어졌다.  

팬들은 그런 김현수를 두고 ‘믿고 보는 김현수 자동 아웃’, ‘역시 믿을 건 김현수 뿐’ 등의 말로 비아냥거렸다.

야구는 결과를 놓고 말할 수밖에 없다. 만약 류중일 감독이 김현수 대신 타격감이 살아난 카를로스 페게로를 4번 타순에 배치했더라면 어땠을까. 지면 내일이 없는 경기였는데, 류중일 감독의 고집은 참 대단했다.

LG는 2회 말 선두 페게로가 키움 선발 최원태로부터 2-2 동점 솔로 홈런을 날렸다. LG는 이어진 기회에서 2점을 보태 4-2로 앞섰고, 계속된 1사 만루 때 타석에 들어선 김현수가 그만 1루 쪽 병살타를 날리고 말았다. 경기의 흐름을 완전히 가져올 수 있었던 장면에서 나온 김현수의 범타는 결국 LG의 발목을 잡고 말았다. 기대했던 김현수의 한 방만 터졌더라면 키움은 필승조를 계속 투입하기가 부담스러웠을 터였다.

이 장면은 2008년 한국시리즈에서 무기력했던 김현수의 모습, 그 잔상이 겹쳐 떠오르게 했다.

2008년 10월 31일 밤 10시 30분께. 잠실구장 하늘에선 요란스러운 축하 불꽃놀이가 이어지는 가운데 그라운드에서 SK 와이번스의 우승 시상식이 열리고 있었다. 관례상 준우승팀인 두산 베어스 선수들도 마지못해 줄을 지어 그라운드로 나갔다. 그 대열에 김현수는 보이지 않았다.

한창 시상식이 진행되고 있는 도중, 두산 구단 라커 출입문이 조용히 열리면서 김현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김현수는 좌우를 돌아보지 않고 덕아웃 옆으로 향했다. 남들의 시선이 별로 미치지 않는 그곳에서 김현수는 시상식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눈자위엔 물기가 채 가시지 않았고 충혈돼 있었다.

때마침 “한국시리즈 MVP 최정!”을 외치는 장내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그라운드에 울려 퍼졌다. 관중석에서 “최정”을 연호하는 소리가 낭자했다. 그 순간, 김현수는 발걸음을 돌려 라커 쪽으로 사라졌다. 뭇 상념이 그의 뇌리를 스쳤을 것이다. 김현수보다 한 학년 위인 최정은 김현수와 마찬가지로 고교 시절 최고타자에게 주는 이영민 타격상 수상자였다.

둘은 프로에 들어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선의의 경쟁을 펼쳤던 터였다. 5차전 9회 말 1사 만루에서 때린 그의 타구는 야속하게도 SK 투수 앞으로 굴러갔고, 병살타가 돼버린 그것으로 한국시리즈는 막을 내렸다. 부질없는 가정이지만, 만약 김현수의 한 방이 터졌더라면, 프로야구 역사의 수레바퀴는 다른 방향으로 굴러갔을지도 모른다.

아직 스무 살에 불과했던 김현수가 받았을 그 순간의 충격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자신으로 인해 만사가 물거품이 됐다는 자책감과 부끄러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생각들이 교차했을 것이다. 드라마가 없었던 2008 한국시리즈. 반전의 여지조차 없이 2차전 이후 내리 밀려버렸던 두산으로선 김현수가 가을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우뚝 설 수도 있었건만, 끝내 그런 장면은 볼 수 없었다. (참고로 2008년 한국시리즈 때 김현수의 기록은 21타수 1안타였다)

당시 김경문 감독은 5차전이 끝난 뒤에 가진 기자회견 자리에서 한 기자의 질문에 단호하게 말했다. “김현수보다 나은 타자가 누가 있습니까. (9회 말 상황에선) 사인을 안 내고 그냥 믿고 맡겼습니다. 큰 경험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베이징 때 그랬던 것처럼 야구를 잘할 때 하늘 높이 떠 있다가 방심하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알았을 겁니다. (김현수는) 우리 팀뿐만 아니라 앞으로 한국을 대표할 타자입니다. 다음에 찬스가 오면 현수가 우승시켜줄 겁니다.”

5차전 직후 허탈감에 빠진 두산 구단의 한 관계자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현수가 FA가 되기 전까지는 구단에 우승을 안겨주겠지….” 김현수는 메이저리그에 진출하기 직전 해였던 2015년에 김태형 감독 밑에서 기어코 한국시리즈 우승을 맛보았다. 메이저리그에 다녀온 다음 2018년에 김현수는 FA 신분으로 115억 원이라는 거액을 받고 LG로 말을 갈아탔다.

그리고, 모처럼 맞이한 포스트시즌에서 그의 굴욕은 데자뷔 됐다. 돌이켜보면, 지난 2006년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신고선수로 출발해 온갖 어려움과 괴로움을 용케 딛고 일어섰던 김현수였다. 그랬던 그가 이제는 조금만 잘못해도 팬들의 비난과 질책을 한 몸에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

자못 염려스럽다. 한국야구 대표팀에 뽑힌 그가 2020년 도쿄올림픽 티켓이 걸려있는 프리미어12에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할까 봐서. 김현수의 ‘가을 굴욕’은 진행형이었다.  김현수가 가을 야구무대에선 유독 부진한 것은 참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이상한 현상이다. 

/홍윤표 OSEN 선임기자

(사진 위) 김현수가 2008년 한국시리즈 5차전 마지막 기회에서 허무하게 병살타를 친 뒤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장면.

(사진 아래) 2019년 준플레이오프 4차전이 끝난 다음 김현수가 아쉬움 속에 얼굴을 감싸쥐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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